[메아리]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낸시 마이어스 作, '인턴' <2015> / http://movie.daum.net

예전에 40대 후배가 공무원인 부인을 대신해 한동안 가사를 전담한 적이 있다. 직장이 몇 개 월동안 파업하자 놀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집안 살림을 떠맡게 된 것이다. 함께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그는 "오늘은 마누라가 저녁 먹고 들어왔으면 좋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 먹지 그러냐"고 했더니 "청소는 대충 하면 되는데 매일 저녁상 차리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며 "가끔 반찬투정까지 한다"고 하소연해 주변사람들이 박장대소(拍掌大笑)했다. 요즘은 남자들은 곧잘 음식을 만들기 위해 주방을 드나든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먹방'의 영향도 있다. 장년층 중에는 어린 시절 부엌에 들어갔다가 할머니에게 혼난 기억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내 녀석이 부엌에 드나들면 못 쓴다"는것이 옛 어른들 정서였다. 남성은 바깥일, 여성은 집안일을 한다는 성 역할의 고정관념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이젠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를 대신해 아이를 돌보거나 살림을 하는 남성이 의외로 많아졌다. 전업주부(主夫)다. 물론 낮에는 회사에서, 밤에는 가정에서 '투잡'하는 '수퍼우먼'들은 훨씬 많지만 이젠 사회적인 인식이 변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능력 있는 여성을 미국에서는 '트로피 아내'(trophy wife)라고 한다. 1980년대 말 미국에서 등장한 용어로 전문직종에 두각을 보이거나 사업가로 인정받은 아내와 같이 사는 것을 부상(副賞)으로 받는 트로피의 개념으로 간주해 '트로피 아내'로 불렀다. 반면 이런 아내를 외조하기 위해 직장을 포기하고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맡는 남성을 '트로피 남편'(trophy husband)이라고 부른다.

영화 인턴(2015년작)은 트로피 부부의 애환을 잘 그려냈다. IT시대에 편승해 작은 인터넷쇼핑몰을 직원 5명으로 시작해 3년만에 250명이 일하는 중견기업으로 키운 30대 여사장은 능력과 미모를 갖춘 캐리어우먼이다. 젊은 여성들의 로망이 될 만하다. 남편은 아이를 돌보고 아내를 외조하기 위해 잘나가는 직장을 포기하고 가정을 책임졌다. 트랜드를 반영한 영화다.

미국인들에게 결혼생활에서 중요한 가치는 '가사분담', '좋은 집', '적절한 수입', '행복한 성생활' 및 '충실함'이라고 한다. 여론조사기관인 퓨 리서치 센터가 지난해 발표한 조사결과다. 성공적인 결혼의 조건으로 가사분담을 꼽은 것이다. 이제 집안일에는 남녀 점점 구분이 없어졌다. 미국 얘기가 아니라 우리나라도 그렇다. 집안일만 하는 여성은 감소하고 있다.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최근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비경제활동인구 중 육아·가사를 하는 남성은 모두 17만 명으로, 기준을 새로 정립한 2003년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오로지 가사활동에 전념하는 남성은 16만6천 명이었고, 육아에 힘쓰는 남성은 4천 명이었다. 이처럼 육아보다 살림만 전담하는 남성이 늘어난 것은 고령화 때문이다. 은퇴 후 일을 하지 않고 집 안에 있는 남성이 가사를 전담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반면 30대 여성을 중심으로 고용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한 요인이다. 성 역할 고정관념이 무너지고 성 역할 평등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사고가 박힌 옛 어른들이 보면 혀를 찰 일이지만 세상은 그렇게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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