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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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견해들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한 1885년 4월 5일을 그 기점으로 잡는 게 일반적이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올해 한국 교회는 선교 132년을 맞은 셈이다.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역사다. 그동안 적지 않은 역기능들이 있었고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만만치 않았지만, 기독교가 이 땅의 문명 개화와 근대화에 이바지한 공적은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폭과 무게를 지닌 것이다. 선교 30년 남짓한 시점에 이광수는 벌써 '야소교의 조선에 준 은혜'(1917) 라는 글을 통해 조선에 서양사정을 알려 준 일, 도덕의식의 진작, 교육의 보급, 여성의 지위 향상, 조혼의 폐습 교정, 한글의 보급등이 모두 기독교를 통해 이루어진 성과임을 일깨운 바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식민주의 폭력 아래서는 항일 민족운동을 이끌고, 공산주의 횡포 앞에서는 반공운동에 앞장섰으며, 군부 독재 아래서는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기독교는 우리 근현대사에 굵고 뚜렷한 자취를 남긴 수많은 지도자들을 길러낸 모태와도 같다, 지금도 기독교 신앙을 통해 정체성을 세우고 자아를 실현하여 나라 안팎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기고 있는 인물들이 적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기독교가 국가 발전을 추동해 온 공적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복음을 빙자해 세속과 영합하고 부와 명예를 좇거나 권력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부끄러운 자취가 적지 않으나 기독교가 그동안 이루어 낸 성취는 이를 가리고도 남을 만하다.

이런 한국 교회가 오늘날 심각한 위기의 국면에 빠져들고 있다. 1995년을 정점으로 신도 수가 계속하여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에 대한 일반의 인식과 신뢰가 악화 일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6년 한 해, 개신교도가 14만 명 줄어든 대신 가톨릭은 219만 명이나 늘어났다. 이는 단순히 세계적인 종교 인구의 감소 추세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개신교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불신이 깊어진 때문임을 시사한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지난 5월 실시한 '2017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 가장 신뢰하는 종교로 불과 18.9%의 응답자만 기독교를 꼽았다. 이는 같은 해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인구 대비 기독교인 수 19.7%에도 못 미치는 수치로서, 신도 중에도 교회를 불신하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말해 준다. 이같은 신뢰도는 우리나라 3대 종교 중 가장 낮은 것으로, 가톨릭(32.9%)과 불교(22.1%)에 크게 못 미친다. 기윤실의 2013년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자가 44.6%에 달했다. 2015년 '불교사회연구소' 조사에선 무려 62.5%의 응답자가 개신교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대체로 우리 국민 절반 이상이 개신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요인은 묻지 않아도 충분히 알 만한 것들이다. 타 종교에 대한 독단적 배타성, 팽배해 있는 물신주의, 결코 복음적일 수 없는 성장 제일주의 및 거대주의, 교회 조직과 지도자들의 도덕적 일탈 등이 항상 비판 또는 자성의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 12일 등록 교인 수만 10만 명이나 된다는 서울 명성교회에선 세습을 금지한 교회법을 조롱하듯 전임 김삼환 목사의 아들 김하나 목사에게 담임 목사직이 세습됐다. 교계는 물론 세간에도 꽤 시끄러운 논쟁거리가 되어 있으나 교회 세습이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인가. 일각에선 전국적으로 세습 교회 수가 500을 넘는다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교회 조직은 아무나 신학교 세워 목사를 양산하고, 누구나 교회 세워 목사 행세를 해도 좋을 만큼 난맥상에 함몰돼 있다. 결국 나라를 큰 혼란 속에 몰아넣고 만 제2 제3의 최태민 '목사'는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인 것이다. 교단이나 각종 기관장 선거에는 막대한 금품이 난무하고, 이권을 둘러싼 세속의 법정 싸움은 밥 먹고 차 마시는 일만큼이나 예사롭다. 천박스런 물량주의와 거대주의는 또 얼마나 역겨운가. 개신교는 올해로 종교개혁 500 주년을 맞았다. 이 땅의 개신교는 또 다시'개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교회는 이미 자정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루터가 그러했듯, 아래로부터의 변화, 평신도 일반의 각성이 유일한 해법이다. 맹랑한 기복신앙에 잠겨 생각 없이 관성처럼 교회에 출석하는 일만으로는 위기의 개신교를 개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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