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이정균 객원 논설위원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며 해당 기사와 직접적 연관이 업습니다 / 클립아트코리아

30년만의 최악으로 규정된 7.16수해를 겪으며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지인들로부터 안부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 공통적으로 "청주는 큰 재난이 없는 곳으로 알았는데 이번 수해를 접하고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비가 쏟아지는 걸 본 기억이 없는 나로서도 적잖이 놀랐다. 수해를 당한지 한 달 여가 지난 지금 응급복구가 겨우 이뤄졌을 뿐 곳곳에는 아직도 수마로 인한 상처와 피해 현장이 즐비한 실정이다. 농작물 피해는 아예 복구가 불가능하다.

7.16수해는 우리를 새로운 현상에 놀라게 하는 한편 또 다른 새로운 현상에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은 숙제를 남겼다. 하늘은 비를 뿌리고 우리는 하늘이 내린 숙제를 풀어야 한다. 7.16수해의 특징은 짧은 시간 집중호우와 재난·재해 대비 정책 미비로 요약된다. 며칠에 걸쳐 내릴 양의 비가 갑자기 일순간에 들이 붓듯 쏟아지는 자연 현상을 인간이 막을 방도는 없다. 하지만 막을 수는 없으나 대비할 수는 있고 어떻게 대비 하느냐에 따라 피해를 어느 정도 줄일 수도 있고 최소화 할 수도 있다.

30년만의 최악의 폭우라고 규정함으로써 7.16수해에 따른 우리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모면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 때문에 앞으로 비슷한 규모나 혹은 더 심각한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도 같은 방법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자연은 우리에게 일상의 범상한 재난 의식과 대처로는 범상치 않은 재난 상황에 대비하지 못한다는 교훈을 줬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뼈아픈 방식으로 말이다. 앞으로도 30년만의 폭우가 올지 고려 공민왕 시절 대홍수로 청주 중앙공원 자리에 있던 감옥이 물에 잠겨 근처 압각수라는 나무에 올라가 고려인들이 목숨을 건졌다는 것처럼 수 백 년만의 폭우가 쏟아질지 모를 일이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여 재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건 하나마나 한 이야기이며 그걸 모르는 사람도 없다. 위기관리의 성패는 최악의 상황을 현실적 과제로 받아들이느냐 비현실로 치부하느냐에 달렸다. 리스크 개념의 문제이다. 리스크 개념이 있어야 재난·재해 등의 위기에 대비하여 다양한 정책을 모색하고, 정책을 구체화하기 위해 예산을 배분하고, 따라서 위기관리정책이 효율적으로 집행되는 선순환 구조가 작동할 것 아니겠는가.

현실은 어떠한가. 재난·재해 등의 위기관리에 대한 인식이 과거보다 높아진 것은 사실이나 정책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정책결정권자가 선거를 의식하여 결과물이 당장 눈에 띄고 많은 유권자들에게 즉물적 호감을 살 수 있는 인기관리용 정책에 함몰되다 보니 위험 상황이 발생 할 수도 있고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재난정책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미리 대비하지 않는 재난 상황은 요행주의의 행운을 무력화 시킬 뿐임에도 재난 정책 예산은 가성비 떨어지는 것으로 치부되어 악순환 구조가 반복된다.

그러나 재난 대비 부실로 인한 피해규모와 재난 상황을 최소화 했을 때 투입된 재난 예산을 비교할 때 피해액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엄밀히 따지면 재난 정책 예산만큼 가성비가 탁월한 항목이 달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임기가 정해진 정책결정권자의 근시안적 안목 때문에 한정된 예산이 소모성, 전시성 행사와 선심성 정책으로 증발되는 현실을 목도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예산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예정적 수치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은 예산이론의 상식이다. 예산에는 예산을 통해 달성하기 위한 국가, 지방자치단체의 목적과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재난·재해 등의 위기관리정책과 관련된 국가와 충북도, 각 시·군의 예산이 어느 수준인지 궁금하다. 예산 없는 재난 정책은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리스크 개념 없이 재난 예산 배분도 있을 리 없다. 수해복구를 위한 특별한 배려 요구도 필요하지만 재난·재해 등에 대해 리스크 개념 변화에 바탕을 둔 정책과 그에 따른 예산 배분이 관건이다.

7.16수해 이후에도 재난·재해에 대해 정책적 변화를 찾기 위한 모색을 보기 힘든 것은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재난·재해 관련 정책 집행자는 지방자치단체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지자체 주민들은 재난·재해 영향권 하의 공동운명체이므로 주민들이 재난·재해 관련 정책의 변화를 생활 속에서 감지하지 못하면 그 정책은 성공의 길로 가기 어렵다. 7.16수해가 남긴 숙제의 무거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자연 현상은 디지털 시대처럼 격변하는데 재난 대응은 아날로그 시대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