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덕 작 오대산 1989

주명덕은 1989년 <풍경>展에 전시한 풍경-사진들에 특정의 장소명을 기입하지 않고 단지 '풍경'이라고 일관되게 표기했었던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그런데 1993년 일본에서 출판된 <잃어버린 풍경> 이후로 잡지 등에 실린 그의 풍경-사진들 도판 밑 혹은 옆에는 장소명이 기입되곤 한다. 오대산, 지리산, 태기산, 한라산, 가지산, 윤문산, 천봉산, 설악산, 구룡령 등.

그런데 그가 사진에 장소명을 기입하더라도, 그것이 특정한 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필자에게 흥미롭게 느껴진 것은 작품의 제목과는 달리 구체적인 지역이 아닌 포괄적인 지역, 즉 오대산이나 설악산 혹은 구룡령을 한 시각으로 포착한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지극히 단편적인 부분만을 찍은 것이란 점이다.

어쩌면 혹자는 그것을 선택/배제라는 이분법적인 사유체계를 개입시켜, 주명덕의 풍경사진들이 주체중심주의 시각이 작동된 것으로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주명덕 의 풍경사진들은 그와같은 선택/배제라는 대립구조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가 찍은 대상, 즉 사진의 프래임 밖을 혹자가 상상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진 밖이 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곧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명덕의 풍경사진에서 볼 수 있는 곳은, 당신이 흔히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리 잡고 사진 찍기를 하지 않을 그럴 장소로 보인다. 이를테면 주명덕의 사진들은 당신의 멋진 포즈(모티프)가 부재하는 배경이 모티프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 주명덕의 풍경사진들에는 모티프가 부재한다. 말하자면 그의 사진들은 모티프/배경이라는 대립구조로부터 이탈해 있다고 말이다.

더욱이 그 단편적인 풍경은 그곳이 오대산(의 어느 곳)인지 아니면 설악산(의 어느 곳)인지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명덕이 어느 사진 밑에 혹은 옆에 '오대산'이라고 표기하더라도 그곳이 오대산의 어디인지 혹은 그곳은 오대산이 아니라 설악산이나 구룡령 등에서도 봄직한 혹은 볼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보인다. 결국 그 각각의 사진은 그곳이 어딘지를 묻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말하자면 그의 풍경사진들은 특정한, 즉 누구나 알고 있음직한 명소(名所)를 찍은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유홍준이 <나의 문화답사기>를 통해 가볼만한 곳이라고 우리에게 제공하듯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다. 당신은 주명덕의 풍경사진들을 보고 그곳이 아름답기 때문에 한번쯤은 꼭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다음과 같이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주명덕은 그러한 풍경을 찍었을까?

어쩌면 주명덕은 '풍경'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그리고 그 풍경사진들은 달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깨끗한 색상이나 뚜렷한 풍경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어두운 분위기로 나타난다. 이런 점들 때문에 필자가 그 어두운 풍경사진들을 보고자 할 때 어느 곳에 시점을 두어야 할지 망설여진다. 특별한 형상이 필자의 눈에 포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풍경-사진들은 특이하게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특이함은 아름다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찍은 것이라고 단정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흔히 당신이 이해하는 자연의 풍경을 보일 듯 말듯 흐려 놓는다. 그래서 그의 풍경사진은 필자에게 마치 대상(이미지) 그 자체에 빠져드는 것을 주의시키는 듯 보인다.

만약 필자가 그 사진 이미지에 빠진다면, 오히려 그 대상을 알지 못할게 될 것이라고 당부하듯 말이다. 때문에 필자는 그 어두운 풍경사진으로 가까이 접근하기보다 오히려 그 사진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일정한 거리유지'는 물리적인 간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그것이 시각적인 간격이 아니라 심(心)적인 거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마음으로 찍은 사진'이란 말인가? /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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