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에 소주 한잔이 주는 '삶의 여백'

청주 삼겹살 거리 삼겹살집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마을 끝자락에 돼지우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집 옆에 있었는데 번식력이 강해 개체수가 늘어나자 아버지는 마을 끝자락으로 옮겼다. 소년은 학교 갔다 오면 리어카를 끌고 동네 초입부터 끝집까지 잔밥을 수거해야 했다. 많고 많은 자식 중에 왜 하필 나한테 냄새나는 고된 일을 시키는지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어디 이 뿐인가. 소년은 음식찌꺼기를 돼지들에게 배식해준 뒤 장화를 신고 우리 안으로 들어가 돼지똥 치우는 일을 해야 했다. 겨울에는 그나마 견딜만했지만 한 여름에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냄새나고 질퍽거렸으며 한 눈 팔면 돼지들이 우리를 뛰쳐나와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소년은 돼지 키우는 재미가 솔솔 끼쳐왔다.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한 아이라며 어른들이 칭찬하고 돼지우리도 제일 깨끗하다고 했다. 아랫동네 윗동네 할 것 없이 소년이 키운 돼지가 제일 맛있다는 소문도 났다. 담백하고 부드러운 육즙이 입안을 가득 감싸는 맛이야말로 일품이란다. 씹으면 씹을수록 침샘을 자극하고 구수한 맛까지 더해져 많이 먹어도 질리거나 거북하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소년은 용기백배하여 새끼 치는 일과 수퇘지 거세하는 일까지 배워 혼자서도 쑥쑥 잘 해냈다.

청주 삼겹살 거리 삼겹살집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양복을 곱게 차려입고 청주를 다녀오더니 성안길 중앙공원 골목의 삼겹살집을 인수했다. 식당이름은 '귀로(歸路)'였다. 그 날 이후 시골에서는 이틀이 멀다하고 돼지를 잡아야 했다. 아버지는 돼지고기와 초정약수, 그리고 텃밭에서 가꾼 채소류를 트럭에 싣고 식당으로 가져갔다. 저녁때마다 식당은 문전성시였다. 어머니가 산속에서 직접 채취해 만든 효소와 생강 등을 첨가한 간장소스에 고기를 담군 뒤 연탄불로 구어먹는 맛은 인근의 삼겹살집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귀로'만의 비장한 무기였다.

게다가 초정약수로 입가심을 했으니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고 문 밖까지 손님들이 줄 서 있었다. 그 비결은 간장소스와 육질 좋은 고기와 초정약수에 있었는데 고단한 서민들의 삶에 새로운 활력과 에너지를 주기에 충분했다. 어머니는 배추와 무, 마늘과 상추를 더 많이 키워야겠다며 기뻐했다. 자식들 학비걱정 덜 수 있고 이따금 시내 구경도 할 수 있으니 앞으로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이다.

청주 삼겹살 거리 삼겹살집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그렇지만 사람의 일이든, 자연의 일이든 아름다움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날도 아버지는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소년이 꿈나라에서 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아버지의 고함소리와 어머니의 흐느낌이 찢어진 창호지 사이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밖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는 가게 운영을 놓고 동업자와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뒤 이것저것 따지거나 묻지도 않고 모든 운영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저 많은 돼지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보름달의 실루엣이 차고 슬프게 창호지에 어른거렸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더 이상 돼지를 잡는 일도, 시내를 나가는 일도 없이 초야에 묻혀 살았다.

40년 전의 일이다. 새삼스레 옛 생각에 젖는 것은 청주삼겹살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육즙 쏟아지는 고기, 간장소스, 파절이, 그리고 후덕한 인심과 삶의 풍경이 담겨 있기에 청주삼겹살이 주목받고 있다. 추억은 속절없고, 삼겹살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고단하고, 세상은 온통 비명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따라 입안에서 쏟아지는 그 육즙의 황홀경에 빠져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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