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9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 뉴시스

시인 출신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얼마 전 취임식에서 공무원들에게 "부당한 명령은 내리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영혼 있는 공무원이 되어 달라"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박근혜 정부시절 청와대와 장차관의 부당한 지시로 공무원들에 의해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작성된 것을 의식한 발언일 것이다. 하지만 권력의 눈치를 살피며 상식 밖의 행위를 하거나 정책을 바꾸는 것은 어디 공무원뿐일까. 최근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우표' 발행은 '영혼'이 공무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박정희 대통령 생가보존회'의 요청으로 경북 구미시청이 지난해 4월 우정사업본부에 신청하면서 진행된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사업은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우상화'라는 말이 나왔고 심의과정도 '졸속'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하지만 지난해만 해도 9명이 참석해 '만장일치'로 발행을 결정한 우표발행심의위원회(심의회)가 정권이 바뀌자 총 12명이 참석해 8명이 발행 철회에 손을 들은 것은 황당함을 넘어 실소(失笑)를 자아내게 한다. 불과 1년 만에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의견을 내는 '거수기 심의회'로 전락한 것이다.

최근엔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일시중단을 결정한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가 '거수기'라며 뭇매를 맞고 있다. 재적이사 13명 전원이 참석해 단 한명만 의결에 반대했다. 전문가 집단·국민여론과 동떨어진 결과다. 정부의 탈핵 정책에 대해서는 원자력학계, 원전업계, 신고리 5·6호기 현장 인근 주민, 한수원 노조 등을 중심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원전공사 중단에 대해 국민여론은 찬반이 엇비슷했지만 전기생산을 위한 원자력 발전 이용에 대해서는 찬성이 59%에 달했다. 하지만 한수원은 비밀리에 기습적으로 이사회를 열고 정부 방침대로 했다. 아무리 탈원전 정책이 문재인 정부의 의지라 해도 한수원 이사회의 압도적인 결정을 보면 위원들의 소신이 의심스럽다. 국가의 중요 정책결정을 졸속으로 처리했으니 이사들을 '거수기'라는 손가락질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한수원은 "정부 공론화를 적기에 수행하기 위해서는 빠른 이사회 의결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고 했지만 탈원전이 그렇게 시급했을까.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시사만화가 김성환 작가의 고우영 현대사 1편 '시사만화로 보는 시대상'에는 '거수기 시대' 가 나온다. 김 작가는 "이승만 대통령의 말이라면 비판 없이 무턱대고 "찬성이요" 하고 따르는 국회의원들이나 장관들을 '거수기 국회의원' 또는 '거수기 내각' 이라 비꼬았던 시절이 있었다. 대통령 말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고 따르는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에 대하여 '지당장관(至當長官)'이라고 불렀고 게다가 대통령 말씀에 감복까지 하여 눈물까지 흘리는 장관에게는 눈물을 글썽인다는 뜻에서 '낙루장관(落淚長官)'이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적었다. 권력자의 독주가 제어되지 못하는 자유당의 실상을 보여주지만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다른 형태로 '거수기 시대'는 되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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