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한인섭 부국장겸 정치행정부장

자료사진 / 뉴시스

한국의 비버리 힐스라 할 수 있는 압구정(狎驅亭)은 조선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책사(策士) 한명회(1415~1487)가 한강변에 지은 정자에서 지명이 유래했다. 계유정란을 주도한 그는 세조 임금부터 성종 때까지 3대에 걸쳐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지위를 누렸다. 그랬던 그가 정계 은퇴 후 선비들과 '유유자적'하려 했던 압구정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권력과 부의 상징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압구정은 이름부터 남달랐다. 명나라를 방문했던 한명회가 재상 예겸(倪謙·1415~1479)에게 부탁해 얻은 이름이다. '책사 한명회'를 쓴 이수광은 한양을 방문했다 한명회의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갔던 예겸이 한강에 배를 띄우고 정자를 오르 내리며 즐겼던 풍치를 회상하며 '갈매기가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순수하게 살아 가라'는 뜻을 이름(압구·갈매기의 무리)에 담았다고 했다.

이수광은 이렇게 설명한다. "갈매기를 해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갈매기들이 찾아온다. 그러나 갈매기를 잡으려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가까이 오지 않는다. 갈매기와 같은 미물에게도 해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겸은 한명회를 향해 "조선과 중국이 비록 같지 아니하나 사람의 마음은 같고, …우리의 도(道)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들이 양국을 대표해 만났던 점을 고려하면 개인적 친분을 넘어 외교적 전략도 '압구(狎驅)'에 담겨있는 셈이다.

거창한 이름만큼 한명회의 정자는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들이 한번쯤은 압구정을 찾아 연회를 즐기길 원했던 곳이라고 한다. 때론 왕실의 연회를 대신할 정도였다. 사단이 난 것은 성종 12년(1481) 이었다. 중국 사신을 대접하려던 한명회는 왕실에만 사용하는 '장막'을 빌려 달라고 했다가 성종의 노기를 건드렸다. 결과는 압구정을 비롯한 한강변의 정자를 철거하라는 어명을 내릴 정도였다.

이랬던 압구정은 1970년초반까지만 해도 미나리를 재배하는 '미나리꽝'이 대부분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는 외제차와 유명배우들이 북적이는 '로데오 거리'가 됐다. 현대백화점 본점과 청담동 명품거리가 조성된 것도 이 무렵 이었다. 동대문에서 몇천원 짜리 티셔츠를 가져와 5~6만원대 가격을 붙여도 불티나게 팔렸던 시절이다. 그런데 요즘 압구정 로데오 거리 건물에 공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억대 권리금도 사라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한인섭 부국장겸 정치행정부장

한명회의 정자는 조선 대표적인 풍속화가 겸재 정선의 '압구정도'를 통해 당시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영조 17년(1741) 정선이 그림을 그릴 당시 소유자는 누구인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팔작지붕의 압구정과 강변에 늘어선 또 다른 정자들은 당시의 풍요를 한껏 엿 볼 수 있게 한다. 강변을 내려다 보는 팔작지붕 정자의 정취와 미나리꽝, 비버리힐즈 로데오거리 모습이 교차한 압구정은 또 어떻게 변화할까.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