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기획]
장총 한정 메고 또래 여학생이 건낸 태극기 품고 전장으로
'국가 지키겠다'는 사명감에 자원입대··· 형산강 붉은 핏물 뒤로하며 북진
이승만 대통령 귀향명령 떨어져 생환···73명의 전우중 10여 명만 살아남아

6.25전쟁 당시 소년병으로 참전했던 김창중씨가 전투 중 머물렀던 민가에서 한 여학생에게 '나라를 꼭 지켜 달라'며 받은 태극기를 보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신동빈

[중부매일 송휘헌 기자] 6.25전쟁에 소년병으로 참전했던 김창중(84·청원구 내수읍)씨는 이제는 거동도 불편하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

고령의 나이로 눈가에 주름은 지나간 세월을 감추지 못했지만 전쟁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씨는 1950년, 북한의 남침과 함께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대구로 피난을 떠났다. 이후 그곳에서 "국가를 지키겠다"는 사명만으로 당시 17세의 나이에 8사단에 소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전쟁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국군에겐 신병훈련 조차 사치일 뿐이었다. 김씨와 같은 소년병들은 군복과 같은 보급품도 지급되지 않았다. 단지 군복대신 건내 받은 솜옷 한벌과 장총 한정을 어깨에 메고 또래로 보이는 여학생이 건낸 태극기를 가슴에 품은 채 전장으로 나갔다.

"국가를 지킨다는 사명감만을 가지고 입대했습니다. 당시 인근마을에서 또래로 보이는 여학생이 광목(廣木)으로 만든 태극기를 건냈는데 그것을 가슴에 품고 총 한정을 받아 영천 안강전투에 투입됐습니다. 전장의 분위기는 표현조차 할 수 없었고 전쟁을 치르면서 살겠다 죽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소년병으로 참전했던 김창중씨가 경주 여래산 전투의 격렬함을 설명하고 있다./신동빈

그가 투입된 전투는 치열했다. 여래산을 경계로 인민군과 우리군의 공방은 수 십일째 진행됐다. 수 차례 산의 주인이 바뀌며 그렇게 40여 일의 시간이 지나갔다. 오랜전투 끝에 국군은 여래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국군은 인민군을 몰고 북쪽으로 밀고 나갔다.

"전투를 벌이다 소년병들이 인민군 대좌도 생포해 군인들에게 넘겨준 일도 있었습니다. 전투상황이라 잠을 잘 수도 없었고 걸으면서 자는게 전부였으며 하루에 한끼를 먹으면 잘 먹는 것이라 배고픔과 잠에 대한 힘듦도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상황은 다 거짓말입니다. 하루 생존에 대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인근 기계천 형산강은 붉은 핏물이 돼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9사단 수색대에 배치돼 끝없는 전투를 벌이며 산기슭을 따라 올라갔다. 이렇게 2달 간 걸어 도착한 곳이 강원도 고성이었다.

고성에 도착한 김씨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귀향 명령이 떨어졌다. 귀향증을 받고 주변을 돌아봤지만 함께 사선을 넘어온 소년병들은 대부분 보이지 않았다.

김창중씨 귀향증 사진/신동빈

"1951년 4월에 고성에 도착했고 대통령의 귀향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군인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전역증 대신 귀향증을 받았는데 귀향증을 손에 쥐고 주변을 돌아보니 함께 소년병으로 입대한 73명의 전우들은 대부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 10여 명만 남아 생환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켠으론 현실에 대한 참혹함이 전해졌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느낀 김 씨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꼭 한마디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나라가 위험에 처한다면 지금 젊은이들도 당연히 국가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국이 먼저냐 민주화가 먼저냐라고 물어본다면 정답이 뭔지는 모르겠다."면서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의 6.25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는 것 같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6.25 참전 용사들과 그들의 유가족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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