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후커플의 지구별 신혼여행] 15. 네팔 히말라야트래킹(2)

● 후후커플은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동반퇴사하고
1년 간 세계여행을 떠난 조현찬(32)·연혜진(28) 부부다.

새벽부터 푼힐 전망대에 올라 히말라야 봉우리들을 직접 마주하고 나니, 안나푸르나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졌다. 벅찬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푼힐에서 만났던 다른 한국인 여행자분들과도 루트가 겹쳐 계속해서 만났다. 지칠 만하면 다 같이 바위에 앉아 쥐포와 초콜릿 등 싸 온 간식들을 나눠 먹고, 한참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힘든 줄도 몰랐다. 확실히 여행 중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다.

얼마 전 히말라야에 눈이 많이 왔다더니 내리막길에선 아이젠 없이 한 발짝도 내딛기 어려웠다. 미처 장비를 챙기지 못한 분과 한쪽씩 나눠 낀 채 서로 손을 잡아주며 조심조심 내려왔다.

우리가 묵을 타다파니 마을은 바로 앞산에 있는 데도, 중간에 다리가 없어 산 아래 계곡까지 쭉 내려갔다가 다시 산을 타야 하는 루트였다. 한국에서는 계속해서 산 정상을 향해 오르기만 했었는데, 여기선 산봉우리를 몇 개나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집라인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있어도 무서워 타지도 못할 거면서. 하지만 며칠째 계속되는 트래킹에 익숙해진 걸까. 이젠 어디까지 가야겠다고 조바심이 나기보다는, 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에 집중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한 발자국을 잘 내딛는 것뿐이었다. 계속 걸으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내 인생도 저 높이 점을 찍어놓고 올라가기 급급해하기보다는, 그냥 지금 한 걸음을 잘 내디디면 어딘가로 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트래킹 5일차, 촘롱에서 시누와 마을까지는 공포의 코스라 불린다. 지그재그 돌계단으로 산 아래까지 쭉 내려갔다가 다시 건너편 산꼭대기까지 다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날부터 시큰거리던 왼쪽 무릎이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더 욱신거렸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비였다. 이러다가 ABC까지 못 올라가는 게 아닐까 아찔했다. 힘들어하는 날 보고 오빠도 지금이라도 내려가야 하는 게 아니냐며 걱정했다. 체력만 믿고 가다가 무릎이 더 아파 걸을 수 없게 되면 약 이천 달러짜리 헬기를 불러 내려와야 한다.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내려가야 할까. 하지만 온 길로 다시 내려가는 것도 엄두가 안 났다. 아픈 건 매한가지니까.

결국 왼쪽 무릎에 보호대 2개를 겹쳐 착용하고, 몸을 옆으로 틀어 한 발씩 천천히 돌계단을 내려왔다. 허투루 내딛는 법 없이 일정하게 걷다 보니, 속도는 두 배로 느려졌다. 하필 돌계단만 종일 걷는 날. 트래킹이 끝난 후에야 알았지만, 무릎이 아팠던 이유는 내가 스틱을 한쪽만 짚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양쪽에 스틱을 짚고 다녔어야 했는데, 한쪽만 짚고 다니다 보니 안 짚었던 쪽 무릎이 아팠던 거다.

그렇게 나는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정한 속도로 걷는 나를 발견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내 숨소리와 발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 같았다. 오롯이 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기도 했고, 앞서가던 오빠가 손을 내밀어 끌어주면 우린 다시 둘이 되어 이야기하며 걸음걸이를 맞춰갔다. 길 위에서 혼자만의 시간도 갖다가 오빠와 데이트하는 느낌도 있다가, 이게 트래킹의 매력이 아닐까.

트래킹 6일차, ABC 바로 전 마을인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 Machapuchare Base Camp)에서 묵고, 다음날 새벽 ABC에 올라 일출을 보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새벽 일찍 일어나 푼힐에 오를 때 너무 힘들었던 나는, 차라리 오늘 ABC까지 올라 숙소를 잡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캄캄한 새벽부터 1시간 반 동안 눈길을 헤치고 가느니, 오늘 무리해서 올라간 뒤 다음날 숙소 바로 앞에서 일출을 보는 게 나았다. 우리가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일정을 단축하는 데에는 음식도 한몫했다. 힘든 것도, 추위도 다 견딜 만 했는데, 어느 롯지나 같은 메뉴판에 매일 똑같은 음식을 먹는 게 고역이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가격대만 높아졌다. 피자를 시켰는데 쿠키같이 딱딱한 도우에 케첩만 올려있었고, 양념치킨을 시켰는데 고춧가루만 묻힌 닭고기가 나왔다. 그나마 챙겨온 컵라면이 우리가 유일하게 믿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매일 같은 라면을 먹었는데도 질리지 않았을 만큼, 라면 국물이 그렇게 우리에게 힘을 줄지는 미처 몰랐다.

MBC에서 ABC 구간은 가장 힘들지만 가장 멋졌던 구간이었다. 해발 3,700m 이상의 고산지대라 호흡도 가쁘고, 2시간 동안 무릎 높이로 쌓인 눈길을 헤치며 걷느라 체력소모도 컸다.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였다. 그런데도 단연 최고의 구간이라 손꼽는 이유는 히말라야 산봉우리에 완벽하게 둘러싸인 채 눈길을 걷는 것이 실로 환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광활한 자연은 카메라에 담기지도 않았다. 사진에 담으려 애를 쓰는 게 무색해, 우리는 자꾸만 사방을 둘러보았다.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다른 여행자들이 점처럼 보였다.

아아, 인간이 이렇게 작고 미약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구간에 눈이 너무 많이 내리면 고립되거나 길이 폐쇄되면 구조 헬기를 부르거나 다시 내려가야 하는데, 우리는 하늘이 도와준건지 비나 눈도 맞지 않고 무사히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어느 등산가가 말했다. 내가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이 나를 받아주었다고. 여기에 오르고나니 그 말이 무슨 뜻일지 조금 알 것 같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히말라야 봉우리들 한가운데 서 있는 내가 떠오른다. 사진에는 담지 못했지만, 평생 마음속에 남을 한 장면이 있어 참 다행이다.

9시간의 트래킹 끝에 우리는 마침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ABC(해발 4,130m)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에 장식된 색색의 깃발들이 보이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벅찬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동안 잘 참고 올라왔으면서, 막상 정상에 도착하자 힘들었던 것만 생각났다. 나 자신이 그렇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 감격스러운 순간, 남편과 함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하고 좋을 수 없었다.

드디어, 우리가 정말 해냈어. 롯지에 미리 도착해있던 한국인 아저씨와 중국인 여행자들과 함께 기쁨을 나눴다. 서로에게 축하한다며 응원의 인사를 나눴다. 적어도, 그곳에 있는 우리는 모두 자랑스러웠다. 서로 얼마나 힘들었을지 아니까.

다음 날 아침 일찍 베이스 캠프 앞으로 나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는데도, 히말라야 설산들은 여전히 빛났다. 거짓말처럼 주홍빛으로 산들이 물들기 시작했다. 푼힐에서도 봤던 일출이지만, 비교도 안될 만큼 신비롭고 환상적이었다. 매일 떠오르는 해라지만, 어찌 매일 같은 해일 수 있을까. 여행을 하면서 많은 해돋이를 봤지만, 내 생에 가장 특별한 해였다. ABC에서의 일출까지 보고나니 이제 여한이 없었다. 이틀에 걸쳐 내려오는데도, 신이 났다. "오빠, 우리가 진짜 해냈어!" 이 기분을 잊고 싶지 않아, 오빠와 자축하며 내려왔다.

다사다난했던 트래킹 일정을 끝내고 포카라에 내려오니,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모른다. 잔잔한 페와 호수를 보니 우리 마음마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이 호수를 보면서 '우리가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젠 자신감이 가득 넘치는 우리가 서 있었다.

고대하던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고 잠도 푹 자면서, 우리는 산에 다녀온 것이 금새 꿈처럼 느껴졌다. 다만 무릎이 아파 절뚝거리는 우리 걸음걸이만이 꿈이 아니었음을 실감나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는 산에 오르지 말기로 했다. 이 좋은 경험은 평생 한 번으로 족하다며, 이제 트래킹은 그만하자고 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다시 트래킹을 하러 이곳에 올지도 모르겠다. 산을 사랑하게 만드는 곳. 너무 힘들었지만 그만큼 눈물 나게 좋았던 곳이었으니. / 후후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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