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해당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자료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지난 1974년 7월 무더운 날, 미국 텍사스 주 콜맨에서 있었던 실화다. 경영 전문가 제리 B. 하비가 처가를 방문했다. 처가 식구들이 무더위 속에 선풍기 하나 틀어놓고 도미노 게임을 하고 있던 중 하비 장인이 뜬금없이 "우리 애빌린시(市)에 가서 스테이크 먹을까?"라고 말했다. 아내는 생각 없이 동의했고, 다른 가족도 그저 동의하는 눈치였다. 하비 역시 '장모님이 괜찮으시다면......'하며 조건부 동의했다. 사실 하비는 애빌린이 그곳에서 85km나 떨어져 승용차로 2시간이 걸리는 데다 승용차가 에어컨 없는 구식이어서 고생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다. 여하튼 가족들은 애빌린에 도착해 그저 그런 맛의 스테이크를 먹은 뒤 차 안에서의 찜통더위, 도로의 먼지, 최악의 승차감 등의 고통을 겪으며 귀가했다.

장모가 먼저 투덜거렸다. "난, 사실 가고 싶지 않았는데 가자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어, 괜히 갔어." 하비도 장모 의견에 동의했다. "애빌린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단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갔을 뿐이에요." 그러자 아내도 말했다. "당신 좋으라고 갔던 거예요. 이렇게 더운 날 외출하는 것은 미친 짓이죠." 애빌린에 가자고 말을 꺼냈던 장인이 입을 열었다. '다들 지루해하는 것 같아서 제안해 본 것뿐이었는데......'

결국 누구도 가고 싶지 않았지만 모두 갔던 것이다. 이 같은 이율배반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속으로 동의에 내키지 않았지만 왜 모두 가겠다고 동의했는가? 말이다. 이 현상을 하비는 '애빌린의 역설(Abilene paradox)'이라 했다. 이는 집단 의견이 자신과 상반되어도 거부하지 못한 채 집단 의견을 따르는 심리를 일컫는 사회심리학 용어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애빌린의 역설'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식당이나 술집에서의 회식(會食) 자리 말이다. 어느 누가 먼저, 특히 위계서열상 높은 사람이 특정 메뉴를 주문하면 대부분 '저도요, 미 투' 하고 입을 모은다. 만장일치 때도 있다. 주문 메뉴를 가급적 일치시키려는 공통된 의도가 숨어 있다. 물론 반드시 상사 또는 구성원과 같은 음식을 먹고 싶어서가 아니다. 튀는 행동으로 왕따가 되지 않을까 혹은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괜한 노파심이나 공동체 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폭탄주 마시기'는 여지없이 '애빌린의 역설'이다. 소주를 맥주에 말아 마시는 소폭(燒爆)의 경우 거스르기 힘들다. 마시고 싶지 않지만 분위기나 집단사고 때문에 마지못해 마시기 일쑤다. 이때 개인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열외 없이 술잔을 돌려가며 마시는 '돌돌이 잔'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마시지 않을 수 있지만 집단사고가 자신의 의지를 어느샌가 무너뜨린다. 남이 시장에 가니 나도 따라가는 셈이다. 일종의 부화뇌동(附和雷同), 제비 따라 강남 가는 꼴이 아니겠는가?

'애빌린의 역설'은 행위가 이뤄진 뒤 집단 사고에 따른 동조 행위에 대해 원인규명이 이루어지기 십상이다. 문제는 서로를 탓한다는 점이다. 자신은 애빌린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이 가자고 해서, 아내가 가자고 해서, 장모가 동의해서 등등 말이다. 나는 소폭을 마시지 않으려 했는데 네가 강요해서, 분위기를 깨기 싫어서 마셨다며 상대와 상황을 비난한다. 조건 없이 동의했음에도 그 행위 결과가 만족하지 않으면 불편과 불만족의 원인을 반드시 타인의 탓으로 돌린다.

집단 내 일치된 행동은 구성원의 소통이 잘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애빌린의 역설'에 의한 소통은 환영(幻影)에 불과하다. 극단적 표현을 빌자면 분위기에 편승한 자아 살해다. 집단 의견에 감히 반대하지 못한 채 자신을 무시하고 그냥 동의했기 때문이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우리는 '애빌린의 역설'을 강요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아니, 우리가 나서 '애빌린의 역설'을 즐기고 있지 않나 의심스럽기도 하다. 창조적 상상(想像)과 일상적 사고(思考)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이제 '애벌린의 역설'에 감겨 자기희생을 감행하지 말고, 자아가 빠진 패키지 삶에서 벗어나자. 그래야 공동체에 꼭 숨어 있는 자신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열린 소통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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