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연의 차 이야기] 2회

따사로운 봄 햇살에 눈이 부시다. 점심을 먹고 나니 심한 춘곤증에 고개가 자꾸 떨어진다. 깨어보니 사방이 절간같이 고요하다. 백주의 도심 속에서 적막감이라니. 모든 사람들은 무심천으로 혹은 산과 들에 꽃놀이 갔나 보다 생각하니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잠도 깨우고 마음도 가라앉히는데 차가 최고지. 물 끓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차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차' 밖에 없어". 술이 말했다. "무슨 소리, '술'이 없다면 이 세상은 무미건조한 삶을 살 수밖에 없으니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술이 최고야". 옆에서 듣던 물이 말했다. "둘 다 귀하지만 물이 없다면 차도 술도 있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차와 술의 중재를 섰다. 서로가 최고라는 '다주론(茶酒論)' 의 재미있는 이야기다.

물맛이 좋다는 생수로 차를 우려 보았다. 차 맛에 대한 품평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좋은 물은 단맛이 많이 돌고,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유독 매끄러운 것을 느낀다. 물론 차도 좋아야 그 맛이 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옛 차인들은 물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옛 문헌에 한강의 우중수, 충주의 달천수, 속리산의 삼타수가 찻물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산속 깊은 곳에서 흐르는 산정수가 좋다고 하는데 수질검사를 하지 않은 곳은 마시지 않기 때문에 그 옛날의 좋다는 물을 기대할 수는 없지 싶다.

몇 잔을 이어 마셨더니 잠도 달아나고 머리는 맑아졌다. 혀끝이 아릿해지는 진한 차 맛을 느끼고 싶어 다관을 기울여 들고 찻물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똑. 똑. 똑 . 농도 짙은 찻물이 찻잔에 떨어졌다. 차의 엑기스 같은 것. 커피의 에스프레소 같은 것. 그것은 옥로다.

남송시대 '학림옥로(鶴林玉露)'라는 글로 유명해진 나대경이 있었다. 관직을 두루두루 한 그에게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과 주고받은 청담을 실은 수필형태의 글이다. '학림(鶴林)'이라는 자기의 호와 주옥같은 글을 모았다고 해서 '옥로(玉露)'라고 붙여진 말이 후대의 차인들에게 많이 인용되고 있다. 차를 마실 때 마지막에 떨어지는 '옥로'를 받는 사람은 그 중 어른이거나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차인들은 옥로를 가늠하기 위해 많은 숙련을 한다. 공경과 정성을 담아내는 옥로. 코끝이 찡하다.

참으로 메마른 봄이다. 울긋불긋 아름다운 꽃들은 땅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 있는 힘을 다해 진액을 빨아올리고, 사람들은 건강에 좋다는 물을 찾기 위해 몇 백 미터의 깊은 곳을 파고 암반수를 끌어올린다. 마치 아기가 엄마의 마른 젖을 빨아대는 것처럼.

정지연 원장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술, 일품으로 꼽히는 차의 '옥로' 가 명품이라 해도, 만물의 근원인 물에 비할까. 가뭄으로 푸석거리는 온 누리에 세차게 퍼붓는 달달한 비를 상상해본다. 소복하게 피어있는 앵두 꽃잎이 바닥에 젖어 널브러지고, 사람들은 머리에 손을 얹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겠지. 쌓였던 미세먼지로 인해 신작로 바닥은 흙탕물이 될 것이고, 이윽고 촉촉하게 젖은 나뭇잎 끝으로 물방울이 떨어질 것이다. 이것이 21세기의 '옥로' 라 말하고 싶다. 똑. 똑. 똑. /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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