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 수필가

혈기왕성하던 초록빛 나무들이 알록달록 색동옷으로 갈아입더니 어느새 이것마저도 버겁다는 듯 벗어버리고 있다. 황금 들판의 논은 벼의 그루터기만 남긴 채 황량한 모습이다. 참 잘 자라던 풀들도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듯 풀죽은 모습으로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다.

11월은 모두를 비워내는 모습에서 자칫 외롭고 쓸쓸할 수 있는데, 온 나라가 최순실 게이트까지 겹쳐 혼미해진다.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현실에 답답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국정이 흔들리는 모습이 안타까워 아슴아슴 가슴이 아파진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되었을까.

가는 가을이 아쉽기도 하지만, 답답한 마음에 친구들과 지진피해로 관광객이 줄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경주로 향했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유적지만한 곳이 없나 보다. 신라의 역사가 잠든 대릉원과 신라왕궁의 후원인 안압지를 산책하는데 마음이 평온해지며 설레기까지 하니.

석굴암으로 향하는 꼬불꼬불한 산길, 마지막 열정을 뿜어내는 아름다운 오색단풍이 우리를 반긴다. 단풍철이 끝난 청주와는 달리 고운 자태를 보니 새삼스러워 탄성이 절로 났다. 주차장에 내리니 '세계유산 석굴암 석굴'이라는 글귀가 반긴다. 꾸무럭한 날씨인데도 경주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확 트인 조망에 치유와 힐링이 되는지 짜릿한 전율이 느껴진다. 가시거리가 좋지 않아 동해는 볼 수 없었지만,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푸른 소나무로 덮여있는 토함산과 동해가 조화를 이루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단다.

매표소에서 본존불이 있는 곳까지는 2km 남짓, 친구들과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했다. 군데군데 지진으로 인해 '낙석 주의'라는 큰 표지판과 푸른 천으로 덮여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예전과 다름없는 힐링이 되는 아름다운 산책길이다.

석굴암 본존불은 천체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 한가운데에 높이 약 3.5m의 당당하고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동해를 향해 앉아 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어 머릿속이 정지되는 기분이다. 석굴암은 석굴 전체가 불교 세계의 이상과 과학기술 그리고 세련된 조각 솜씨가 어우러져 있어, 절정기 신라 미술의 수준과 더불어 신라 왕실의 신앙심과 자신감을 보여주는 불교 미술의 역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때의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751년에 창건하기 시작한 통일 신라 시대의 사찰로 1973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및 연화교·칠보교 등 경내의 조형물 하나하나가 신라 불교 미술의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늦가을인데도 주변에는 화려한 단풍이 드리워져 운치를 더한다.

설화에 따르면, 경주 모량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품팔이를 하다 죽은 대성이 대상(大相) 김문량의 아들로 환생하여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대성의 생전에 완성하지 못하였고, 결국 신라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혜공왕 때인 774년에 완공되었다. 1962년에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고,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는 아랑곳없이 늦가을 추위에 계절은 더욱 맛깔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가을빛이 곱게 내려앉은 천년고도 경주에서 그윽한 신라의 향기를 발산하는 불국사와 석굴암 등 세계 문화유산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에 흠뻑 빠져드니 모든 시름이 가셔지는 것 같다.

행복한 상념에 잠겼다가도 인터넷만 보면 가슴이 저리다. 전대미문의 최악의 국가 위기상태로 몰고 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서,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비유한 '득롱망촉'이라는 고사성어가 귓가를 맴돈다.

이난영 수필가

시인 백낙찬은 "인생을 부귀로서 낙을 삼는다면 좀처럼 낙을 누리지 못한다"라고 하였고, 율곡 선생은 "穴居之獸(혈거지수)는 知雨(지우)하고, 巢居之禽(소거지금)은 지풍(知風)이라." - "구멍을 파고 사는 짐승은 비가 언제 올지를 알고, 둥우리를 짓고 사는 짐승(새들)은 바람이 언제 불지를 안다"라고 말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본래 짐승들보다도 더 뛰어난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났고,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 아닌가.

그런데 헛된 욕심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고도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래서 인간의 무지를 신이 내린 가장 큰 형벌이라고 했나 보다.

마음을 가다듬고 신라 사람들의 불교에 대한 열정과 뛰어난 예술혼이 어우러져 창조된 우리 민족 최대의 걸작 불국사 경내를 음미하듯 돌아본다. 백제의 솜씨, 고구려의 기상, 신라의 정성이 모여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꽃피웠듯이 공직자는 맡은바 중심을 잡고 국정에 임하고, 정치인은 당리당략보다는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펼친다면, 휘청거리던 대한민국호는 다시 힘차게 순항하리라 굳게 믿는다.

# 약력

▶2000년 공우문학, 한맥문학으로 등단
▶청풍문학회, 청주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수필문학회, 한맥문학회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부회장 역임
▶충청북도교육청 재무과장 역임
▶수필집 '난을 기르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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