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교사 이야기] 김현식 제천여자중학교

예로부터 차례나 제사상에 반드시 올리는 과일로 棗(조, 대추) 栗(율, 밤) 梨(이, 배) (시, 감)가 있다. 과일마다 심오한 뜻이 담겨있는데 그 중 감과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하고자 한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이 세상의 지당한 이치겠지만 유독 감만은 그렇지 않다. 감 씨를 심으면 감나무의 조상 격인 고욤나무(열매가 작고 씨앗이 많아 식용으로는 부적합)가 발아되는데, 이 고욤나무가 3~5년 쯤 자랐을 때 감나무로 접목(接木)을 해야 감을 달 수 있는 온전한 감나무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해서 누구나 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님을 일러준다. 마치 고욤나무가 제 몸을 갈라 진화 된 다른 종(감)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결단과 극한의 고통을 감내 해야만 비로소 감나무로 살아갈 수 있듯이, 사람 또한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과 결단 그리고 인고(忍苦)의 과정을 거쳐야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깊은 메시지가 담겨있다. 또 감나무를 베어 나무의 결을 보면, 수령과는 상관없이 열매(감)를 달았던 나무의 속은 신(검은 무늬)이 있김현식 제천여자중학교 고 열매를 달지 않은 나무는 신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자신들의 피와 살을 나누어 자식을 생산하고 혼신의 노력으로 자식을 훈육하는 과정에서 마치 감나무의 신과 같은 상흔이 골수에 남는다는 절절한 비유다. '천하에 상처 없이 자식을 얻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하여 조상을 기리는 제사상에 반드시 감을 올림으로써 그 의미와 교훈을 상기하고자 했을 것이다.

'親'자는 立 + 木 + 見 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會意(회의) 문자다. 字源(자원)과 파생된 의미를 살펴보면, 나무(木) 위에 올라서서(立) 멀리를 바라보는(見) 사람이 어버이라고 해서 '어버이'라는 대표적인 뜻과 '몸소', '친하다' 등의 몇 가지 뜻을 더 가지고 있다. 품안의 어린 자식은 어느덧 부모의 키를 훌쩍 넘고 생각과 지식 또한 부모를 능가하여 더 이상의 걱정은 부질없으련만 부모는 자식이 장성했다 해서 선뜻 품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법이다. 장성한 자식들이 출타하고 또 귀가할 때마다 노구(老軀)를 이끌고 동구나무에서 발돋움으로 한 발 앞서 마중하고 또 더 멀리까지 배웅하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글자다.

김현식 제천여자중학교

작고하신 내 부모님 또한 당시에는 흔하지 않게 마흔을 넘긴 연세에 얻으신 막내 딸인 나를 애중히 여기셨다. 해가 뜨건 안 뜨건 이르고 늦은 시각을 가리지 않으시고 막내딸의 출가와 귀가 때면 어김없이 동구로 나오셔서 이 딸이 점으로 나타나고 또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발돋움으로 나무를 지키곤 하셨다. 어느덧 나 또한 그 발돋움으로 자식들을 기다리게 된 이즈음에 이르러서야 부모님의 깊은 속내를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 해마다 명절이 오면 전국의 모든 도로는 혹독한 몸살을 앓는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나는 내심 그 전쟁터 같은 북새통이 부럽기만 하다. 거북이걸음으로라도 아니 남은 전 생애를 걸고서라도 내 부모님께서 계신 그곳에 닿을 수만 있다면 주저 없이 그 행렬 속으로 끼어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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