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종

리우 올림픽으로 지구촌이 한껏 달아오르던 날 새벽, 열대야에 설친 잠도 아랑곳없이 서둘러 TV를 켰다. 양궁 선수로 출전한 '짱콩' 장혜진 선수가 개인전 결승을 치루기 위해 독일 선수와 나란히 서 있다.

장혜진은 키가 작아 땅콩이란 별명을 가졌지만 숱한 고비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나 무섭게 연습하여 기필코 해내는 짱! 이었기에 짱콩이란 별명을 하나 더 얻었다.

과녁을 향해 호흡을 진정하고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판인데 초속 7~8m의 강풍이 분다. 조국의 명예를 걸고 금은을 다투는 절박한 순간에 올림픽 깃대를 흔드는 바람이 부는데 어느 장사인들 긴장되지 않겠는가. 시험 앞에서는 부처님도 떤다는데 만민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사선에 서 있는 그녀는 지금 혹독한 시험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을 치루지 않고는 상을 받을 수 없고 전장(戰場)에 나서지 않고는 영웅이 될 수 없다.

초긴장의 순간, 장혜진 선수가 힘주어 활시위를 잡아당긴다. 입을 앙다물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과녁을 쏘아본다. 숨을 멈추는 순간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공중에 포물선을 그린다. 그리고 강풍을 뚫고 날아간 화살이 과녁에 꽂힌다. 한발 또 한발 집중하는 자세가 무서우리만치 침착하고 의연했다. 상대 선수도 만만치 않아 손에 땀을 쥐는 대결을 펼쳤다. 드디어 마지막 한발로 장혜진의 승리가 확정됐다. 그 한 점에 승자와 패자가 되고 각각 희비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간발의 차이, 거기에 애환이 교차하는 인생은 그래서 슬프다. 패자가 된 리자 운루 선수가 웃으며 축하해 주는 넉넉함이 귀엽고 고맙다.

드디어 장혜진은 올림픽 광장 중앙의 시상대에 올랐다. 제일 높은 단에 우뚝 선 그녀의 목에 금메달이 걸리는 순간 박수가 쏟아진다.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가 오르며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그녀의 오른쪽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힘들었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울컥 눈물이 났다'고 했다.

이 경기를 위해 4천발 가까이 활을 쏘았고 점수 확인을 위해 과녁 사이를 오간 거리가 180km가 넘었다고 한다. 혼자 걸어온 길, 외롭고 힘든 길, 한계의 벽 앞에서 수 없이 주저앉고 싶기도 했겠다. 그렇게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자기와 싸워 이긴 자신이 고마워 울었는지도 모른다.

70m 거리의 과녁은 100원 짜리 동전처럼 아득한데 그 정중앙을 쏘아야 한다. 사공은 순풍에 돛달고 항해하고 싶지만 파도가 방해를 하듯이 혜진이의 화살을 강풍이 저렇게 훼방을 놓는다. 그러나 그녀는 바람을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바람과 하나 되어 차라리 즐기는 듯 했다. 저 담력이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이 대단한 여장부가 시상대 위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렇다. 장혜진도 연약하고 순진한 한 작은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가 더욱 사랑스럽고 예뻐 보였다.

장 선수의 양 옆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이 환하게 웃음을 나누며 서로를 축하한다. 저들은 모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냈고 넘을 수 없는 벽을 뛰어 넘은 초인 들이다. 그들이야말로 땀의 역사를 몸으로 새기며 동병상련한 진정한 동무요, 그러기에 저들은 모두 이미 승리의 월계관을 쓴 자들이다. 메달의 색깔은 다르나 땀의 색깔은 똑 같은 것이기에 저들을 향한 갈채와 환호의 농도가 다를 수 없다.

니체가 말한 짜라투스트라, 곧 초인(超人)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비범한 존재이다. 그날 장혜진은 영락없는 짜라투스트라였다. 그녀의 짜라투스트라 전설은 혼자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그 시간 누구보다 마음을 졸인 그녀의 부모와 고향 교회 성도들의 기도, 새벽을 깨운 국민들의 함성이 거기 지구 반대편 하늘까지 이른 것이다. 즐거워하는 이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이와 함께 울라고 하나 실은 함께 웃어주는 게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정녕 그 날 혜진이의 기쁨은 우리 모두의 기쁨이었고, 태극기가 너무 자랑스러워 그녀와 함께 눈시울을 적시며 애국가를 합창했다.

용비어천가는 뿌리가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으며 꽃과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노래한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성경 구절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그 날도 가슴 속으로 이 좌우명을 수 없이 되뇌며 초월적 힘을 구했을 것이다. 이것이 장혜진을 땅콩에서 짱콩이 되게 한 힘의 뿌리였다.

인간의 육체란 한낱 정신의 노예이나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너나없이 다 그렇게 연약한 상대적인 존재일 뿐이다. 늘 긴장되고 피곤할 수밖에 없는 선수 생활, 그렇게 무력감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장혜진은 절대자에게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며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가 곤고한 날에 웃음을 잃지 않고 평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신앙의 힘이었다. 승리를 확정짓는 순간에 먼저 기도하고 시상대에서 눈물을 흘린 것도 그의 절절한 신앙 고백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돕는 자를 하늘이 도우신 것이다.

이렇게 작은 고추 장혜진은 고국의 새벽하늘에 승전고를 울리며 세상을 제패한 양궁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그녀는 분명코 명궁이요, 아니 신궁(神弓)으로 자랑스럽게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기쁨과 감격, 어쩌면 금메달의 명예까지도 세월과 함께 우리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져 갈 것이다. 인생은 평생토록 크고 작은 매듭을 이어가는 과정과 과정의 연속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녀 또한 환희의 춤을 접고 또 하나의 과정 속에 들어가야 한다. 더 큰 매듭을 짓기 위해 더 많은 땀, 아니 더 농도 짙은 눈물을 쏟아야 한다.

장혜진의 또 다른 별명은 '장긍정'이라 한다. 4년 전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되는 아픔에도 웃었고, 이번 리우 올림픽 4강전에서 바람을 잘 못 읽어 3점 과녁을 쏜 순간에도 그녀 특유의 천진한 웃음을 보였다. 그 웃음은 숱한 시련과 싸운 내공이 받쳐주는 여유이며 그녀를 그녀 되게 하는 마력이었다.

그녀가 '장긍정'으로 남아 있는 한 짱콩 장혜진의 올림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천진한 웃음과 눈물을 기억하는 우리의 응원 또한 끝나지 않았다.

유인종


유인종 약력
▶'문학공간' 수필, 시 등단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연대 회원
▶대한기독문인회 회장
▶수필샘회장, 충북수필문학회장
▶저서 수필집 '별처럼 산처럼', '가을에 온 편지' 발간
▶youinch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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